내면일기/마음 듣기

나꼼수 편에 서보고 싶은 이유.

hi-tadpole 2011. 12. 29. 17:31

체계론적 접근은 조직을 하나의 체계로 보고, 조직을 둘러싼 환경과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체계론적 접근에서 바람직한 커뮤니케이션이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조직에게 닥친 위기를 해결할 때 가장 바람직한 커뮤니케이션이 쌍방향 균형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PR 이론을 정립한 그루닉의 우수이론과 그 관점을 같이한다.

이걸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우수이론에서 커뮤니케이션 발달과정의 최정점은 조직과 공중은 끊임없이 상호작용, 혹은 피드백을 통해서 긴밀하게 서로 '속닥속닥' '미주알고주알' 하는데, 서로 동등한 입장, 동등한 정보를 가지고 하는 것, 그것이다.
조금 넓게 보자면 미주알 고주알 하면서 그들은 탄탄한 신뢰를 쌓아가고, 이 신뢰를 쌓아가는 미주알 고주알의 '전략적 방법 개발'이 PR인 셈이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바람직하지 않다. 훌륭한 법을 만들어 놓아도, 그 법을 비켜서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하나쯤은 있고, 그 사람은 거의 대부분 그 법을 만든 사람인 경우가 많고, 그 법을 만드는 사람은 기득권인 경우가 많다. 결국은 기득권은 그 법에 비켜서는 셈이다.

이런 슬픈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고 쿰스는, 비판적 접근이란 말을 해 주었다.
조직과 공중이 피드백을 하기 위해 나누는 정보의 대부분은 어디에선가 흘러나오는데, 그 정보는 바로 조직, 가진 자에서 흘러나온다. 한 때 인터넷의 홍수 속에 막 빠져들어가던 밀레니엄 시기, '인터넷에 떠도는 그 정보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오래된 정보'라는 슬픈 사실을 누군가가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렇다. 인터넷에 유출된다는 것은 이미 기득권자들이 그 정보에서 뽑아 먹을 정보는 다 뽑아 먹고 바깥 세상에 내어 놓는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그 뽑아 먹고 남은 정보들을 분해해서 또 뽑아 먹는 동안, 그들은 양질의 다음 정보를 분해해서 먹어가고 있는 중인게다.

쿰스의 말을 쉽게 이야기 하자면 체계론적 접근에서 정립된 많은 이론들은 대부분 기득권을 위한 것, 즉 조직을 위한 것이지 공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마치 백마탄 초인, 저 멀리 검을 차고 나타난 무림의 숨겨진 고수라도 되는 양 조직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개발'이 아닌, 공중의 중요성과 파괴력을 소개하는 위대한 논문을 써보겠어! 라고 다짐했지만 그것은 다짐에 불과했다. 
논문을 쓰며 피눈물 흘리며 깨달았던 것은, 조직이 공중을 어떻게 구워 삶을까, 였지 공중이 조직을 어떻게 구워 삶을까 에 대한 선행 연구는 없다는 것이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나니, 사람은 발견하는 것이지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발명과 헷갈리면 안되는 게, 발명 또한 발견한 대상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일 뿐이다. 어쨌든, 논문 또한 꼭 필요한 것은 '선행 연구' 인데 그 누구도 선행연구 없이 이론을 만들어낼 수는 없지 않는가. -_-; 그렇다고 모든 선행연구를 부정하면서 뭔가 만들어내는 석사 과정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난 양적 연구라 철학적 함의를 담을 수 있는 깊이 있는 논문은 쓸 수 없었다. 아는 것도 없고 나의 비루한 지식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말싸움에서 이길 수 없으니까.

어쨌든 비판적 접근에 의하면, 우수이론은 '힘'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공평하게, 평등하게, 균형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슬픈 역사, 광주 항쟁 등이 그렇다. 균형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으며,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없도록, 정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린 것이다. 즉, 일방향 커뮤니케이션, 그것도 완벽한 불균형으로 정보를 차단해버렸다. 혹자는 이리 말하겠지, 아니야, 요즘 인터넷도 발달하고 매체들이 다양하잖아. 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건 지나친 낙관이다. 아직도 균형, 혹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불가한 곳은 매우 많다. 이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그렇다. 멀리 찾을 것도 없다. 북한이 그렇고, 우리의 가카도 그렇다. 정봉주의 구속 사건, 그게 바로 우수이론이 간과한 '힘'이다. 
정봉주 사건은 '힘'의 싸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더 큰 힘으로 힘을 누르기 위한 후퇴라고는 하지만 비판적 접근 학자들이 본다면, 이거봐 힘을 또 무시했잖아. 우수이론따위는 그저 이론일 뿐이야! 라고 말할 것이다. 모든 학자들이 긍정하는 것인데, 우수이론은 너무 이상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체계론적 접근을 완벽히 부정할 수는 없다. 체계론적 관점은 어쨌든 이상적이라 해도 아까 말 했듯이 이들이 개념을 발견하여 조합해서 발명한 이론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접근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 그 세상의 눈을 비판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것이 비판론적 접근인 셈이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은 체계론적 접근에 머물러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니꼽고 듣기 거북해도 비판론적 관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들은 체계론적 관점이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꼬집어주기 때문이다. 확실히 체계론적 관점의 이론은 많고, 먼저 주류 이론으로 선점해 버렸다. 이는 지금의 기득권들이 주류로 자리매김해버린 것과 같다. 비판론적 관점은 항상 속상하게 비주류고, 누가 듣든, 안듣든 계속해서 말한다. 너네 싫어. 이거 아니야. 이렇게 말이다.

세상이 바쁘고 복잡하기에 주류들은 비주류이 궁시렁대도 귀찮다. 그러니 자꾸 귀도 닫고 눈도 감는다. 이게 지금까지 우리의 모습이다.

근데 하버마스가 짜잔 하고 나타나서 말한다. '공론장'.이라고.
세상이 바빠지면서 사람들은 정치는 정치가에게 나는 일상생활로! 가 강해지면서 정치와 생활이 분리됐고, 결국 정치와 일상이 함께 공존하는 공론장은 약화되어버렸고 다시 중앙집권체제로 회귀해버렸다.
그런데 인터넷의 발달로 공론장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로 인해 공중은 다시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현 시대의 주류를 꼬집는 비주류들이 뭉쳐서 나타났다. 그들 중 하나가 나꼼수다.

그들은 백마탄 초인처럼 고고하게 잔다르크처럼, 거룩하고 비장한 서양의 그 비판론자들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보다는 '깔때기'가 더 맞는 사람들이다.
돌아보라, 우리의 문학들을.
거룩함과 비장함 보다는 해학과 풍자가 넘친다.
그러나 그들의 날카로움은 해학과 풍자에서 더 넘친다. 난 그래서 김지하보다는 봉산탈춤 말뚝이가 좋다.

아마도 나꼼수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쓰듯 가카의 꼼수를 밝혀냈다면 흥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그들은 거룩한 언론 매체가 아니므로 공론장의 한 귀퉁이이므로, 그냥 하나의 '이야기'이니까.
자신들의 입맛과 특성에 맞게 변형된 것이다.

공론장에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돌아다닌다. 사람은 그 수많은 이야기 중 필요한 것을 걸러 듣는다. (이 거르는 작업, 이제 여기서 큰 담론이 또 펼쳐지겠지만 거기까지는 내가 비루한 지식을 가진 지식인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룰 순 없고.)
알아서 귀있는 자들은 진리를 듣는다. 그런데 그 공론장에서 관용없이 힘을 휘두른다면 폭력인게다.
학교에서 배웠을 것이다. 양반님네를 살짝 비꼬는 봉산탈춤도, 판소리도 모두 양반님네들도 함께 보고 웃었다. 그런 관용이 있는 사회여야 한다.

어쨌든 현재 그들은 쿰스의 '힘'과 싸우고 있다. 나는 그 힘의 반대편에 서서 그들을 돕고 싶다. 그 힘을 만용하는 순간 우리 사회는 또 다시 나락으로 빠질테니 말이다. 또한 나꼼수도 그 '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쫄지마, ㅅㅂ!' 라고 말하는거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비판론적 관점의 약점 중 하나, 무릎을 탁 칠만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감시견의 역할만 충분히 해도 비판론은 엄지 손가락 치켜들어줄만 하다.